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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인 유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NATO(나토)와 러시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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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인 유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NATO(나토)와 러시아의 관계

 

 

우크라이나인 유래

현재인구: 42,953,889명
상주인구: 42,784,252명(2014년 12월 우크라이나 통계청 자료 기준)
러시아의 서쪽, 벨라루스의 남쪽,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동쪽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동슬라브 전통문화 공유, 폴란드 등 이웃 국가들과의 문화적 교류

‘우크라이나’라는 말은 어디서 왔는가?

우크라이나는 숲과 강, 평야가 많으며 남쪽으로는 크림 산맥, 서쪽으로는 카르파티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중심은 드니프로 강(드네프르강, Dnieper River)이다. 동슬라브 민족들이 섬겼던 토속신의 신전이 자리했던 곳도 이 강 인근이었으며, 동슬라브 민족이 처음 세운 국가의 요람인 키이브(키예프)도 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우크라이나’라는 말은 1187년 이파티예프 연대기에 처음 등장했다. 이 연대기에서는 ‘우크라이나’라는 말 대신, 고대 러시아어로 ‘변방의 영토’를 뜻했던 ‘오우크라이나’라는 단어로 표기됐다. 12~13세기까지 이 말은 고대 루시의 남쪽 또는 남서쪽 영토를 의미했다. 17~18세기에 이르러서야 ‘우크라이나’라는 말이 정착됐고 여기에서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크라이나인을 지칭했던 다른 말들, 예를 들면, ‘코자키’, ‘코자츠키 민족’, ‘체르카시’도 함께 통용됐다. 19세기에는 ‘소()러시아인’, ‘남러시아인’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인을 칭하는 말 중에는 ‘호홀’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이것은 우크라이나 카자크(코사크 Cossack) 중 가장 큰 집단이었던 자포로지예 카자크들이 정수리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의 머리를 다 깎는 관습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표현은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인을 무시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19~20세기 초 러시아 서부의 쿠반, 보로네시 주와 같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주민이 한데 모여 사는 지역에서는 이 단어가 가진 경멸적인 색채가 점차 옅어지면서 우크라이나인을 지칭하는 단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크라이나인 - 동과 서의 갈림길에 선 민족 (민족의 모자이크 유라시아, 김혜진)

우크라이나인 (naver.com)

 

우크라이나인

2014년 세계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나라 중 하나는 바로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던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 편입된 일부터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동부 친러 반군의 교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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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Volodymyr Zelensky

출생 1978. 1. 25.

 

 우크라이나 대통령 당선자로, 2019년 4월 21일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선 결선투표에서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다. 젤렌스키는 코미디언 출신의 정치 신인으로, 2015년 방영된 TV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된 고등학교 역사 교사 역할을 맡아 재벌 척결 등 개혁 정치를 펼치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적 인기를 기반으로 2018년 12월 대선에 출마했으며, 2019년 4월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하였다.

 

젤렌스키는 2019년 대선 과정에서 부패를 뿌리 뽑고 세제를 개혁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으며,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정부군과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의 무력분쟁을 끝내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담판을 벌이겠다고도 공언했다. 그러나 젤렌스키가 정치 경험이 전무하고 지지 기반도 없다 보니 대통령직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있다. 또한 일각에선 젤렌스키가 이스라엘로 망명한 반정부 성향의 우크라이나 금융재벌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의 꼭두각시 대선 후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naver.com)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당선자로, 2019년 4월 21일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선 결선투표에서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다. 젤렌스키는 코미디언 출신의 정치 신인으로, 2015년 방영된 TV드라마 <국민의 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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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O(나토)와 러시아의 관계

 

공산권에 대응하기 위해 서유럽의 집단방위기구로 창설됐던 NATO(나토)와 구소련은 냉전시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91년 구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체제가 와해됨에 따라 NATO는 '런던선언'을 발표, 소련과 동구권에 대한 적대적 전략을 수정했으며, 러시아와의 관계도 계속 진척시켜 2002년 공동 의사결정기구인 '나토-러시아 이사회'를 설립시키기에 이르렀다.


■ 냉전체제 붕괴 후 나토와 러시아의 관계

1991년 구 소련연방 해체 후 NATO는 '런던선언'을 발표, 소련과 동구권에 대한 적대적 전략을 수정했으며, 1994년 14개 동구국가 및 구 소련공화국들과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 협정을 맺었다.

1997년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나토와 러시아의 적대관계를 공식 청산하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 역사적인 <나토-러시아 상호 관계 및 협력, 안보에 관한 기본협정>에 조인했다.

이 기본협정은 나토의 동유럽확대를 러시아가 용인하는 대신 '나토-러시아 상설공동위(PJC:the NATO-Russia Permanent Joint Council)'를 창설, 안보문제에 관해 긴밀히 협력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후통보기구로 러시아의 의견이 사전에 반영되지 못했고 1999년 NATO의 코소보 공습 당시 러시아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 편에 서면서 양측의 협력관계가 깨지는 듯 했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에 이어 정권을 잡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유라시아시대'를 내걸고 친 서방 실용노선을 펼치면서 변화가 시작됐고, 2001년 9·11테러로 안보개념이 '테러집단 對 반테러진영'으로 바뀌자 2002년 5월 NATO와 러시아가 국제 테러를 비롯한 안보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공동 의사결정기구인 '나토-러시아 위원회(NRC : NATO-Russia Council)'가 설치되었다.

19+1(나토회원국 19국+러시아)의 형태인 '나토-러시아 위원회(NRC)'는 테러 대응책, 핵.생.화학무기 확산 통제, 미사일 방어, 지역분쟁의 평화유지 및 관리, 민간인 보호, 해상 수색 및 구조, 군사협력 강화, 군비 통제 등 국제안보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공동전략을 세우게 되고 매달 회의를 가진다.

그리고 1997년의 '나토-러시아 상설공동위(PJC)'와는 달리 러시아의 최대 요구사항이었던 사전협의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어느 한 NATO 동맹국 이익과 관련된 지극히 중요한 사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가 금지되며 군사문제 결정권도 없다.

이와 함께 'NATO 동맹국 가운데 어느 한 국가라도 외부의 공격받을 경우 이를 동맹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나토가 집단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다'는 내용을 규정한 '나토 조약 5조'에 러시아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NATO(나토)와 러시아의 관계

공산권에 대응하기 위해 서유럽의 집단방위기구로 창설됐던 NATO(나토)와 구소련은 냉전시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91년 구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체제가 와해됨에 따라 NATO는 '런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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