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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이란. 의의. 1987 6월 항쟁 서른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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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이란. 의의. 1987 6월 항쟁 서른 즈음에

6월 민주항쟁이란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이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그해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이 사건이 은폐·축소된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6월 9일 연세대생이었던 이한열 군이 시위 과정의 부상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면서,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6월 항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1987년  6월  항쟁  일지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

4월13일  전두환 정권, 직선제 개헌 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으로 정부 이양 등 내용 담은 ‘4·13 호헌 조치’ 발표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성명 발표. 경찰의 은폐 조작 폭로

5월27일  야당·종교계·재야단체 인사 주도해 민주화운동의 구심체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발족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 시위 도중 이한열(21)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짐(7월5일 사망)

 

6월10일  국본, 6월 항쟁의 기폭제 된 범국민대회 개최.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학생·시민 약 24만 명 참여.

일부 시위대 서울 명동성당 점거

6월12일  연세대생들, 살인적 최루탄 난사에 대한 ‘범연세인 규탄대회’ 진행

6월15일  명동성당 점거농성 해산, 동시다발적 야간시위 및 철야농성으로 지속적인 투쟁

6월18일  국본, ‘최루탄 추방의 날’ 선포, 최루탄 추방 운동 대대적 전개.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150만 명 참여

 

6월26일  국본, ‘국민평화대행진’ 시위 강행. 전국 37개 시군에서 시민 130만여 명 참여, 3467명 연행

6월29일  전두환 정권,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 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 등 내용 담은 ‘6·29 선언’ 발표

 

전두환은  왜  군을  동원하지  않았나?

“군대  나오면  항상  쿠데타  위험  있어”

6월 항쟁 내내 전두환은 계엄령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12·12와 5·17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그에게 계엄령 선포와 군부 동원은 가장 손쉬운 위기 극복 방안이었다. 그러나 계엄령은 선포되지 않았고 1980년 5월 광주와 같은 유혈 진압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1987년 6월19일.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릴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났다. 릴리 대사는 전두환에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정치범 석방과 자유언론 신장을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전날인 18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최루탄 추방의 날’을 선포하고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150만 명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직후였다. 계엄령 선포는 시간문제였다.

릴리는 레이건의 구두 메시지를 전했다. “계엄령 선포는 한-미 동맹을 저해할 수 있으며 19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를 재발할 수 있습니다.” 평소 대화를 독점하고 자기 말에 자기가 웃던 전두환은 이날 90분에 걸친 회동에서 줄곧 굳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날 밤, 최광수 외무장관이 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엄을 선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릴리 대사가 쓴 회고록(<아시아 비망록>)에 담긴 일화다.

계엄령 선포는 미국이 막은 것일까? 한국 현대사의 권위자인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사학)는 <6월 항쟁>(돌베개, 2011)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차기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를 비롯한 여당 인사들이 쿠데타 가능성 때문에 군부의 개입을 꺼린 점 △이한기 국무총리 서리 등 내각의 온건파가 계엄령 선포에 반대한 점 △5·18의 기억과 광범위한 국민 참여 때문에 군 수뇌부도 개입을 반대한 점 △무엇보다 전두환 자신이 가진 군부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계엄령이란 선택에 이르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실제 6월28일 전두환은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담화문 작성과 관련해 김성익 연설문 담당 비서관을 불러 “군대가 나오면 항상 쿠데타 위험이 있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노태우도 회고록 상권에서 “동원된 군이 누구 편에 서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었다. 미국의 견제보다 쿠데타에 대한 우려가 더 컸던 셈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촛불을 만든 6월의 기억

[6월 항쟁 30주년] 집회 개근한 대학생부터 명동성당서 시위대 보살핀 주부, 노동자대투쟁 이어간 여공까지 2016~2017년 촛불혁명을 성공시키며 문재인 정부를 만들어낸 1987년 6월 항쟁의 숨은 영웅

h21.hani.co.kr

 

 

6월 민주항쟁 의의

6월 항쟁은 군사적 독재 정치가 종식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노태우 정권의 출범으로 귀결돼 군사주의가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각계각층의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항쟁은 노동자, 학생, 시민, 빈민, 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고 항쟁의 전 과정은 바로 이렇게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각성하고 조직적 힘을 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노조를 통해 조직화되어 나타난 7월과 8월,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 되었다.

 

 

 

6월 민주 항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6월 민주 항쟁(六月民主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이다. 4·13 호헌 조치[1]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ko.wikipedia.org

 

  • 6월 항쟁이 일어난 6월 10일 일제 강점기 1926년,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의 장례 때 독립운동세력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2007년 한국일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6명은 6월 항쟁을 잘 모르는 것으로 밝혀졌다.[27]
  • 6월 항쟁이 진행되던 6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전두환은 군 투입 준비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비상조치 계획과 군 출동 지시는 유보됐다.[28]
  • 전두환은 임기가 끝나자마자 여론이 두려워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에 들어가 생활했다.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66087 

 

[새책] 6월항쟁 서른즈음에 - 인천일보

박원순·원희룡·권해효 등 45명 진솔한 이야기 모아 '6월민주항쟁은 박제된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정신이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이 서른 살을 맞는다. 지난 19대 대통령선거는 온 국민이 흘린 피

www.incheonilbo.com

'6월민주항쟁은 박제된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정신이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이 서른 살을 맞는다. 지난 19대 대통령선거는 온 국민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로 군사독재로부터 되찾아 온 직선제 개헌으로 치른 일곱 번째 선거였다. 가장 강력한 동기는 지난겨울 서너 달 동안 촛불을 켜고 차디찬 어둠에 맞서 민주공화국 주인으로서의 양심과 행동을 세계만방에 천명한 우리 국민의 위대한 대장정이었다. 헌정 사상 초유로 탄핵을 결정한 헌법재판소 역시 6월민주항쟁 이후 설립된 문명국가의 국가기구이다.'(유시춘 '여는 글'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이정표인 '6월민주항쟁'의 30주년을 기념한 책이 나왔다. <6월항쟁 서른즈음에>(은빛·264쪽)는 6월민주항쟁의 의의를 새기며, 6월항쟁 당시의 경험담을 되살리는 이야기 모음집이다.

출처 : 인천일보(http://www.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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